1905년, 영국 해군 조선소에서는 지금까지의 전함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배가 건조 되었다.
배의 이름은 HMS Dreadnaught. 두려울 것이 없다는 뜻으로 당시 세계 최강 해군국가이자 해양국가였던 영국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신개념의 전함이었다.
표준형 전함의 시대
드레드노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표준형 전함이라 불리고, 후에 드레드노트가 등장하고 나서는 '프리-드레드노트'형 전함이라 불리는 전함들이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전함의 앞 뒤에 대구경의 주포를 배치하고, 양 현으로 그보다 작은 다양한 구경의 부포들을 배치하였다. 이는 주포로 적의 '주력함'과 교전하고 작은 구경의 포는 적의 순양함이나 구축함, 어뢰정들과 교전하기 위해서 장착 되었다.
프리드레드노트형의 최종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해군의 '미카사'.
이런 해전 사상을 바탕으로 영국 빅커스 조선소에서 건조된 미카사는 러시아를 견제하기위해 맺어진 '영-일 동맹' 덕분에 일본에게 판매된, 당시 영국 해군 주력함인 '마제스틱'급 전함보다 강력하고 체급이 큰 최신형 전함이었다. 당시 영국 의회는 영국 해군도 보유하지 못했던 이런 전함을 동맹국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에게 판매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두고 논란이 일기까지 했으며, 그 결과는 일본 연합함대의 기함이 되어, 러시아의 극동함대를 여순항에 봉쇄하고 발틱함대를 대한해협에서 격파, 러일 전쟁의 승기를 붙잡고, 일제가 한반도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드레드노트
왜? 어째서 영국은 자국이 보유한 전함보다 더욱 강력한 전함을 일본에게 팔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영국해군은 당시 현존하던 해군력의 패러다임을 뒤엎어버릴 수 있는 무기를 구상 중이었고, 그 구상은 바로 저 미카사가 선두에 서서 승리로 이끈 '쓰시마 해전'으로 증명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주력함끼리의 전투라면 오직 대구경 포만이 적의 주력함에 타격을 줄 수 있고, 그렇다면 오직 주포급의 대구경 포(big-gun)를 많이 장비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는 실제로 쓰시마 해전에서 러-일의 주력함들이 10킬로미터 이상에서부터 교전을 시작했고, 그 거리에서 교전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주포뿐이었다는 사실로 증명되었다.
그러면? 전부 대구경 포를 장비하는 배, All Big-gun Ship을 만들면 되지않을까?
요렇게.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HMS 드레드노트. 강력한 대구경포를 10문이나 장착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전함보다 거대하고, 또 증기 터빈을 장착해서 속도도 다른 전함 클래스를 압도한 강력한 전함이었다.
특히 영국이 만들고 실천에 옮긴 해전 독트린은 전세계의 다른 모든 국가를 압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 드레드노트의 등장은 100년 넘게 이어져온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과 그 힘의 원천이 된 영국해군의 몰락을 가져오게 된다.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등장으로 이전까지 주력함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프리-드레드노트급 전함들은 그야말로 전력으로서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같은 거리에서 드레드노트급이 훨씬더 강력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고, 프리드레드노트급 전함들은 주력함에서 순식간에 보조함으로 그 지위가 격하되게 되었다. 이는 미사일의 시대가 열리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드레드노트'의 그림자가 바다에서 사라지게 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위vs2위
문제는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가졌던 영국은 당시 2위 해군국가와 3위 해군국가가 가진 전력보다 많은 전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정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가장 많은 '프리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과 동의어였다. 그 말은, 자신들이 만든 '미래형 전함'이 자신들의 군사적 우위를 단박에 제거해 버린 것이다. 어차피 드레드노트급만이 전력이 된다면, 영국도 이제 막 건조하기 시작했고, 같은 논리로 다른 국가들도 똑같이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1차세계대전이었고, 독일제국이 만든 대해함대와의 전투에서 영국이 자랑하는 '그랜드 플릿'은 판정패를 당하고 만다.
결국 '전략적 승리'로 전쟁은 이겼지만, 대영제국을 유지하던 강력한 해군력이 도전 받고, 결국 2차대전에는 3위 해군국가였던 일본에게 서전에서 완패 당하고 만다.
이게 아이폰이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게, 이런 관심도 없는 배들 이야기가 무슨 아이폰과 상관 있을까?
그건 바로 애플의 아이폰이 이동통신계의 '드레드노트'이기 때문이다. 애플은 영국처럼 이동통신 산업의 1인자가 아니었으나, 아이폰이 몰고온 충격은 그에 맞먹는 정도다. 그 이전까지 '풀터치 폰'에 대한 시장의 반응이나 이동통신 사업자나 단말기 제조사의 반응은 '안 먹힌다'였다.
그러나 아이폰이 등장하고 엄청난 '대박'을 터뜨리자, 너도나도 풀터치가 가능한 물건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기존에 있던 '스마트폰'들은 블랙베리를 제외하고 순식간에 가치가 사라져버렸고, 결국 애플이 휴대폰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기존의 메이커들은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해버린 애플이지만, 자신들이 '뚫어놓은' 풀터치 스마트폰의 시장에 구글이라는 강력한 '제로베이스 스타터'의 등장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결과야 영국과 같은 길을 갈지, 아니면 다르게 끝날지는 두고봐야 알겠지만.
아무튼 그런 '풀터치 (스마트)폰이 성공한다!'라는 시각은 한국에서 두드러졌다. 아이폰이 나오자마자 우리도 만들 수 있다!!라며 국내 업계는 빛의 속도로 터치 폰을 양산했다(14일 주겠소, 터치 화면 만드시오).
그래서 오히려 전세계가 아닌 한국 시장에서는 터치폰은 굳이 아이폰이 아니더라도 넘쳐 났다. 햅틱, 아몰레드, 옴니아 등등. 삼성이 터치 시장을 완벽히 장악한듯 보였으나.. 결국은 아이폰이 들어서자 기존의 '자칭' 스마트 풀터치폰들은 순식간에 '공짜폰'이 되었다.
2009년, 한국에서는 '감압식이 아닌 정전식 터치 방식의 고성능 스마트폰'이 캐쉬카우가 되었다. 마치 '드레드노트'가 해군력의 표준이 되었듯이.
이제 국내 휴대폰 업계도 아이폰 때문에 '0'에서부터 시작해야할 처지가 되었으며, 이는 누구나 1등을 넘볼 수 있는 환경이 형성 됐다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삼성을 비롯한 국내 통신업계는 '드레드노트를 개발한 영국'이 아니라 '독일이 드레드노트를 먼저 개발한 영국'의 꼴이 되어버렸다는 차이가 있을뿐. 1위를 넘볼게 아니라 1위를 지켜야 하는데 손에 쥔 카드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는 거지.